[세계는 지금] 바라던 ‘엔저’ 왔지만 못 웃는 일본

[세계는 지금] 바라던 ‘엔저’ 왔지만 못 웃는 일본: 차원이 다른 금융완화, 스태그플레이션·빚더미 2중고로 돌아와; 2022.07.08 16:21 입력

김영채 기자 weeklyctrade@kita.net

엔화 가치 24년 만에 최저기록 경신“엔저, 경제 악영향” 현지 여론 전환  세계 경기 침체로 시장이 안전자산 선호 국면에 들어섰음에도 이른바 안전자산으로 분류되던 엔화는 24년 만의 약세를 보이고 있다. 수출에 좋다는 이유로 대규모 양적 완화까지 무리하게 감행해 얻으려던 엔저가 실현됐으나 일본 경제는 오히려 스태그플레이션 위기에 시름겨워하고 있다. 지난 상반기 엔화 가치의 하락률은 약 10%로 세계 주요 통화에서 가장 낮은 가치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과 유럽 등의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 우려로 금융 긴축에 돌입해 일본과의 금리 차가 벌어지면서다. 지난달 <닛케이> 신문은 주요국이 인플레이션 대응을 위해 금융 긴축을 서두르는 데 반해 일본은행이 금융완화정책을 계속하면서 기록적 엔저가 벌어졌다고 풀이했다. 외국과 금리 차이가 더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에 외국 헤지펀드 등에서의 엔화 매도가 이어졌다는 것이다. 최근 엔화는 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 영향으로 일본 장기신용은행이나 채권신용은행이 파산하면서 엔 매도가 이어졌던 시기와 비슷한 수준을 보이고 있다. 당시 경제는 디플레이션 국면에 들어섰으며, 기업들은 투자와 임금을 억제했다. 지금 일본 경제도 마찬가지로 기업들이 투자와 임금을 억제하고 있으며 소비 또한 침체돼있다. 반면에 고유가와 엔저로 인해 물가는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 상태가 되면서, 한때 ‘수출 채산성과 가격 경쟁력에 좋다’고 떠받들어졌던 엔저는 순식간에 손가락질의 대상이 됐다. 다만 기록적 엔저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정책을 바꿀지는 미지수다. 스즈키 슌이치 일본 재무장관은 24년 만의 엔저를 기록한 지난 6월 13일 <nhk></nhk>와의 인터뷰에서 외환시장 개입 가능성에 대해 “제 입장에서 코멘트는 삼가고 싶다”며 말을 아꼈다. 마쓰노 히로카즈 일본 관방장관은 향후 외환정책에 대해 “G7 회담 등에서 지나친 변동이나 무질서한 움직임은 경제나 금융 안정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합의된 바, 각국 통화 당국과 긴밀한 의사소통을 꾀하며 필요한 경우에 적절한 대응을 취하고 싶다”고 말했다.   <o:p></o:p>●일본기업 해외생산 비중 커져… 오히려 수입물가 부담 = 엔저를 바라보는 일본인들의 시선이 바뀐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전 세계적인 물가상승으로 일본에서도 서민 생활고가 가중되면서 엔저가 수입물가 상승의 주범 중 하나로 몰린 것이다. 둘째는 수출보다 수입이 늘어난 점이다. 1998년 기준 컴퓨터(주변 기기 포함) 수출은 수입을 7000억 엔 이상 웃돌았다. 하지만 2021년에는 수입이 수출을 2조 엔 이상 넘어섰다. 일본 내 심각한 인력난과 높은 생산비용으로 국내 생산설비 투자가 부진하면서 해외로의 공장 이전이 가속한 까닭으로 풀이된다. 일본 내각에 따르면 일본 제조업의 외국 생산 비율은 1998년 10%에서 2020년 22%로 약 2배 이상 뛰었다. 유니클로 모기업 패스트리테일링의 야나이 타다시 회장도 지난 4월 “엔화 약세 이득이 전혀 없다”고 토로한 바 있다. 유니클로는 중국 내 생산 비중이 높고 미얀마, 방글라데시 등 동남아는 물론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도 공장을 세우고 있다. 마지막으로 엔저가 이제 수출기업들에 더는 크게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퍼진 것이다. <닛케이>는 “근본적인 문제는 엔저를 살릴 산업 경쟁력을 잃었다는 점”이라며 “엔저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산업 강화책을 서둘러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본 경제평론가 카야 케이이치는 <뉴스위크> 칼럼을 통해 “(일본 경제가 엔저 메리트를 얻지 못하는) 최대의 이유는 수출기업 경쟁력 저하”라며 “일본기업은 시장이 성장하지 않고 심지어 가격을 내리지 않으면 판매량이 늘지 않는 제품(즉 부가가치가 낮은)을 다루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베노믹스, 세 가지 화살 모두 빗나갔나 = 그간 일본이 엔저를 통해 경제를 부양하고자 한 시도는 최근 총격을 받아 일본 사회에 충격을 준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주요 경제 정책 아베노믹스(Abenomics)가 대표적이다. 이는 그가 지난 2012년 말 재집권 이후 밀어붙인 경제 정책으로 아베와 이코노믹스의 합성어다. 아베노믹스는 ▷확대재정 ▷확대금융(양적 완화) ▷구조개혁의 ‘3가지 화살’로 나뉘는데, 이 중 핵심은 국채 등을 매입해 시중에 돈을 푸는 양적 완화였다. 특히 일본은 ‘이차원(異次元) 완화’라는 명칭을 붙일 정도로 차원이 다른 규모의 양적 완화를 펼쳤다. 이를 통해 엔화 약세를 유도함으로써 일본기업들의 수출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심산이었다. 아베노믹스 당시 기준으로 일본은행의 국채 매입액은 연간 80조 엔(약 800조 원)이었는데, 이는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절반가량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아베노믹스 성장 전략의 핵심은 공급 측면을 강화해 수요 부문으로 파급효과를 일으키는 데 있다. 아베 정부는 통화·재정 확장정책, 구조개혁을 통해 기업의 경쟁력과 수익성을 높이면 고용 증가와 임금 상승이 뒤따르면서 소비가 늘어날 것으로 기대했다. 소비 진작을 통해 총수요가 증대되면 기업 투자가 늘고, 이는 공급 부문을 더욱 강화해 경제에 긍정적 선순환을 일으킨다는 구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순환은 아베노믹스가 시작한 지 1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보이지 않고 있다. 물가는 올랐으나 임금이 오르지 않으면서 수요 진작에 실패했다. 2017년 즈음 기업 실적이 개선되며 엔저 유도 정책이 호평을 얻은 적도 있지만, 임금인상과 소비증대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이른바 ‘낙수효과’의 실종이다. 2010년대 중반 일본 상장 기업의 사내유보금은 260조 엔에 달할 정도로 실적이 좋았지만, 일본의 노동소득분배율은 2008년 72.2%였던 것이 2017년 67.8%로 오히려 떨어져 수요 부문을 끌어올리지 못했다. 2021년 11월 일본 내각관방성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일본의 노동소득분배율(국민총소득에서 노동소득이 차지하는 비율)은 2019년 기준 50.1%에 불과했다. 가계소비의 경우 1990년의 소비금액 규모를 100으로 뒀을 때 2019년에 일본은 130 정도밖에 성장하지 못했으나 같은 기간 미국은 216으로 두 배 이상 성장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 물가 연구의 1인자로 알려진 도쿄(東京)대학 와타나베 쓰토무(渡辺努) 교수는 최근 <아사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현재 일본은 만성 디플레이션과 해외발 급성 인플레이션이 동시 진행되고 있다”며 소비 침체로 기업들이 상품, 서비스 가격을 올리지 못해 임금이 오르지 않는 악순환이 계속되지만 해외발 식료품 가격 상승과 고유가로 서민 밥상 물가가 오르는 2중고에 처해 있다고 분석했다. 와타나베 교수는 “모처럼 신상품을 개발해도 비싸게 팔리지 않는다면 경영자는 처음부터 개발을 포기할 것”이라며 “그렇게 되면 혁신은 태어나지 않으며 일본 전체 경제력이 저하된다”고 우려했다. 통화·재정 확대는 단기적으로 경기를 끌어올리는 시도일 뿐,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아베노믹스의 마지막 화살인 ‘구조개혁’이 제 역할을 다해야 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 일본 경제는 구조 개선에 성공하지 못하고 모처럼의 엔화 약세 국면도 살리지 못한 채 ‘나쁜 엔저’라는 오명을 쓰고 있다.   <o:p></o:p>●‘부작용’ 가시화되기 시작 = 아베 신조 전 총리와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가 내놓은 대규모 금융완화정책은 효과를 내기는커녕 물가는 물가대로 오르고 경기는 계속 침체 중이다. 소비와 수요는 여전히 침체를 보이는 가운데 물가만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 우려도 나온다. 덤으로 국가 경제에 부담이 되는 부작용까지 얻었다. <닛케이>는 지난 6월 28일 일본은행의 자국 국채 보유 비율이 50%를 넘어서면서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더불어 엔화 약세, 고물가 등 금융완화 장기화의 부작용이 확산하고 있다고도 지적했다. 이 매체에 따르면 일본은행의 국채 보유 비율은 지난 27일 기준 50.4%였다. 지난해 2~3월의 50.0%를 넘어서며 최대를 기록했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가 대규모 금융완화를 시작한 2013년 10%대에서 큰 폭으로 늘었다. 일본은행은 단기금리는 –0.1%로 동결하고 장기금리 지표가 되는 10년물 국채 금리는 0%로 유도하도록 상한 없이 장기 국채를 매입하고 있다. 특히 장기금리 상한을 0.25% 정도로 억제하기 위해 국채를 무제한 매입하고 있다. <닛케이>는 “중앙은행이 발행이 끝난 국채 과반을 점유하고 있는 이상 사태”라고 지적했다. 게다가 중앙은행이 국채를 반 이상 가지고 있기에 “금리 역전 등 왜곡이 심화하면서 시장 본래의 기능이 작동하기 어렵다”며 “일본은행 정책이 역사적인 엔화를 초래하고, 이는 고물가를 부르는 모순에도 직면했다. 완화 장기화의 부작용이 확산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러다 국채 보유 비율이 60%를 넘을 가능성도 있다. 일본경제연구센터 추산에 따르면 일본은행이 장기금리를 0.25%로 계속 억제하기 위해서는 국채 보유 잔액이 지난 3월 말 500조 엔에서 120조 엔 더 늘릴 필요가 있는데, 이렇게 되면 보유 비율은 “60%를 넘는 시나리오도 현실성을 띤다”고 신문은 전했다. 실제로 이달 일본은행의 국채 매입액은 벌써 14조8000조 엔으로 2014년 11월 11조1000조 엔을 제치고 한 달 기준 최대치를 기록했다. 6월 말이 되면 15조9000조 엔에 달할 전망이다. 다른 나라들의 중앙은행과 비교해도 일본은행의 국채 보유 비율은 두드러진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국채 보유 비율은 지난 3월 말 기준 20%대였으며, 이는 유럽중앙은행(ECB)에서도 30%대에 그친다. 심지어 연준은 6월부터 국채 등 보유 자산을 줄이는 양적 긴축도 시작했다. 일본은 미국, 유럽 등과의 금리 차이로 엔화 가치가 기록적으로 추락하는 등 부작용을 겪고 있다. 이런 엔화 약세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자원 가격 급등 등 외국발 악재와 함께 물가를 상승시키고 있다. 민간 금융기관은 보유한 국채를 줄이고 있다. 지난 3월 말 예금을 취급하는 기관의 보유 비율은 11.4%, 보험과 기금 등을 취급하는 기관은 23.2%였다. 장기금리가 상승(국채 가격 하락)으로 인한 위험을 일본은행이 떠맡고 있는 격이다. <닛케이>는 일본 정부가 일본은행 의존에서 벗어나 경제 성장을 촉진하는 개혁에 정면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기업도 금융완화에 의존하지 않고 수익력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했다.